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영화정보
  •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감상평 1
중국역사의 이해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1.
우리가 중국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할 몇 가지의 자세가 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자세와 개념의 정립 없이는 중국 역사를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큰 오해를 불러와서 역사를 하나의 에피소드나 민중의 전승 담으로 가치를 전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의 정신적 자세는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편리하게만 외우려고 했던 연대기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는 그 유구한 시간만큼이나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들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또 중국의 언어나 그 기록을 위한 문자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아서, 또 역사적 사실관계를 당대에 쓰인 것이 아니라 한 왕조가 바뀌거나 최소한 한 세기가 흐른 후에 각자의 시각으로 해석을 붙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역사에 대한 시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중국의 정사(正史)라고 하는 것은 한 왕조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거대한 대륙전체와 그 많은 인민을 역사라고 하는 커다란 틀로 전부다 알 수도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중국의 역사는 사실관계의 역사라고 하기보다는 유추관계의 역사라는 점입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너무나 많은 해석이 가능하고, 누구나 자의적으로 해석해도 무리함이 없기 때문에 지극히 공상적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중국의 고대 역사는 신화와 비슷하기 때문에, 또 문자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라도 그 해석의 방향이 천차만별입니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편의 기록만을 중국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은 큰 오류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세 번째는, 중국 역사는 이중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즉 왕조를 중심으로 한 역사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민중을 중심으로 한 그들만의 역사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어느 것이 진정 중국의 역사인지를 분간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왕조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고, 민중의 역사도 또 중국의 역사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중국역사의 본류(本流)인지
네 번째는, 중국이 인류문화문명의 발상지다 보니까, 역사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문명이 중국으로 모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관계된 모든 국가나 민족이 또 중국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주변국의 역사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중국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로마의 역사나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역사를 모르고서 중국 역사의 진실로 접근한다는 것은 자석 없이 밤중에 바늘을 집는 일만큼이나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 역사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중국역사에 대해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중국을 오해해서 중국역사를 에피소드로 여긴다든지, 중국역사가 그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고 폄하한다든지, 중국 역사에 대해 흥미와 관심을 잃고 가장 큰 민족과 가장 큰 역사를 알지 못한 채 세계역사에 대해 함부로 아는 척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방대한 중국역사를 왕조별로 비교적 잘 정리한 미국의 역사연구가 오우웬 라티모어의 저서를 기초로 해서 대략을 이해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재해석해 봅시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오랫동안 중국 역사를 연구한 선교사가 「중국역사는 너무나 요원하고 단조로우며 애매하다.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너무나 공상적이어서 역사와 우화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라고 말 한 적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성경역사나 영국사처럼 「누가 누구를 죽이고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의 뒤를 이었다」고 하는 식의 무익한 인명록에 인간적 흥미 때문에 때때로 첩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적어 놓은 것을 역사라고 가르쳐온 것으로부터 나오는 말이다.
아마도 그 같은 방법으로 배우는 한 중국의 역사는 세계의 그 어느 나라의 역사에 비교해도 과도하게 많은 연호(年號)라든가, 외국인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인명의 어려움이라든가, 왜곡과 민담의 복잡한 가감으로 흥미를 끌지 못하는 역사로 이해하는 것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또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 관찰자들 간의  입장과 시각이 제각기 달라 어느 것이 사실이고 거짓인지 구분하기 매우 모호하고, 당대에 기록 된 것보다는 수 세기동안 구전되었다가 기록되거나 2차 적 창조나 필요한 부분을 서술을 통해서만 중국사를 대하게 되므로 그 사료적 가치를 측정하기란 정말 난해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배운다면 인류의 역사상에 찬란한 광채와 선지자적인 그림자를 던지는 중국역사의 찬란한 면모를 통해 인류의 모든 역사의 용광로를 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시아에서 발생한 인류의 가장 원시적인 기원으로부터 철학, 종교, 문학, 예술의 발전이 최고정점으로 이르기까지 중국의 위대한 창조적인 시대의 것을 추월하는 문화는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차와 음식의 향신료, 도기와 피혁기술 등이 모두 그러하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철학과 사상뿐만이 아니라 물질문명의 방면에도 우리들은 구주문명의 기원은 거의 구주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부분이 그들이 창조하거나 발견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종이와 인쇄술, 화약과 나침반, 비단과 직조술, 음용의
만약에 중국인들이 피혁기술을 창조해 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그들이 들어가 살 수 있었을 것이며, 어떻게 에스키모 인들이 존재할 수 있는가 말이다.  나침반이 단 1세기만 늦게 발명되었더라면, 오늘날의 구라파의 문명이 아메리카로 이동하는데 몇 세기를 더 많이 흘려보내야 했을지도 짐작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자랑으로, 심지어는 우월하게 까지 거들먹거리며 중국역사를 하나의 만화로 격하시키려는 그들의 역사를 어떻게 지켰을 것이며, 성서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의 그 논거는 중국의 종이와 인쇄술이 아니면 또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말이다.
역사에는 고정된 기점은 없다.  아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도 언제나 더욱 먼 옛날로 갈 수 있다.  역사가들이 기점을 정하는 이유는 연구를 거기서부터 시작하기 위한 일종의 기선을 그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유럽인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연구하여 수많은 추리를 끌어다 붙이고 사실로 왜곡하는 것에 비하면 중국사는 아주 많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도 남을 것이다.
역사 안에는 얼마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그 희미한 사실로부터 시작하여 점차로 커다랗고 먼 사실을 발견하며 그것을 지식의 체계로 모아 역사가 오늘날에 와서야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일부분은 사실, 일부분은 전설, 그리고 일부분은 추측에 불과한 일종의 증거를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역사를 다루다보면 연구자의 지극히 인간적인 요소가 가미되기 마련이고, 또 다시 후대의 사람들은 그 가미된 역사의 진위를 따지느라 또 세월을 흘려보낸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보는 기선을 언제로 잡느냐? 에 따라 역사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부연하면 사실을 보느냐? 역사를 기록한 사람의 인간적 추측과 가미된 요소를 중점으로 보느냐? 에 따라 우리가 전설을 향해 가느냐? 역사의 진실을 향해 진일보하느냐? 의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다.
역사적 기점 위로 가뿐하게 나라가 보자.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이제 우리는 역사를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바로잡고 인류가 지금까지 인정한 최고의 먼
 
2. 은(殷), 전설과 역사의 혼재.
중국사의 서광은 현재로 BC 1766년으로부터 1122년에 걸친 은대(殷代)에 놓여지고 있다.  4,50년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BC 1100년경으로부터 시작한 주대(周代) 이전에는 중국에 믿을 만한 역사는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었고, 또한 그 이전의 은대라든가 다시 하대(夏代)의 제제왕(諸帝王)의 연표와 그들의 기록물 등을 포함한 막대한 전설이 전하여 지고 있으나 이들의 재료는 전부 역사가에 의하여 「선사(先史)」기록의 표찰을 붙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500년의 시간이 전설과 사상의 국토로부터 벗어나서 확실한 역사의 국토 안으로 붙여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500년을 더 살게 된 것과 같으니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말이다.  중국사의 기선이 周代의 초기로부터 殷代의 중기까지 밀고 들어가게 된 일은 극히 우리를 가슴 설레게 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전후의 고고학의 신발견은 중국역사의 기선을 다시 멀리 서광대의 더 깊은 곳으로까지 확대하려는 고무적인 양상이 나타나고 잇다.
훨씬 오래 전 것이다.  중국연구가들이 성대한 준비를 갖추고 일어나게 된 동기와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70년 전에 현재로서는 은의 영토로 되어 있었던 황하지방에서 수골(獸骨)이라든가 귀갑(龜甲)에 문자를 조각한 중국의 그 옛날의 서찰(書札)의 파편이 발견되어 나왔다.  고대중국문자의 形態는 벌써 정확하게 2500년 이상을 경과하고 있는 청동제품부터로 알고 있었으나 조잡한 방법으로 조각하여 붙여진 부호는 그것 보다
중국문자형의 변화에 관해 오랜 세월에 걸쳐 연구한 결과는 서양의 언어연구에 다년간 사용되어 온 것에 뒤지지 않은, 진보한 비교연구법에 의하여 이들의 갑골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고대자료의 모든 가치가 명확해진 것이다.  갑골문자의 많은 내용이 「점술」이었다.  사람들이 전쟁이나 수렵에 나서기 전에 그들은 먼저 무운(武運)이나 천후(天候)를 기원하는 질문을 각인한 것이다.
다음에 얕은 구멍을 내거나 혹은 움푹 들어간 곳을 긁어서 뚫은 다음에 그 귀갑이나 수골에 뜨거운 열을 가한다.  충분히 가열시킨 다음에 다시 차게 식히면 뼈나 껍데기는 두터운 부분과 엷은 부분으로 팽창률과 수축률이 달라져서 균열이 생긴다.  그 균열은 처음부터 뚫어 놓은 구멍으로부터 넓어지는 속성이 있다.  귀열(龜裂)이 그리는 문자의 모양을 보고 점술사는 원하는 질문에 대하여 길흉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 같은 종류의 점술은 사람들의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상의 필요에 직접으로 결부되었으므로 특별히 명료한 증거로 남겨져 있었다.  이들이 바로 은대의 사람들이었다.
언어와 행동의 유형에 따라서 기록된 것이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이 같은 신탁(信託)의 유물과 같이 그들의 연대기의 유물의 단편이나마, 또는 그 반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들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헌의 두 가지의 型이 상호간에 다름을 설명하고 있다.  殷代의 중국인이나 「로마시대」의 희랍인이 기록을 만들었을 때 이들은 이것을 양식화한 것이다.  인간의 여러 모양의 행동은 몇 개의 유형으로 압축되고 여러 모양의 사건은 세분된
그러나 갑골문자는 개개의 종류의 자료다.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행동이 기록되던 이전의 또는 실행되는 이전의 행동의 계획이거나 아니면 행동에 관한 관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점술적 질문과 회답과는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명확하게 殷人자신들만의 전통에 따라서 묻거나 듣는 것이지만, 당대에는 특별하고도 현실적인 것이었다.
역사의 대부분은 행동한 것과, 되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기술하는 것으로서 역사가는 다만 분석하고 추측하며, 대조 교정하여 기술이 실제와 어떻게 정확히 일치하는가를 확증하려는 노력에 불과한 것이다.
이 점술적인 자료는 사람들 자신들이 행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의 기술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뜻이 있는 것은 사람들의 사고방법을 기록한 것이며 또한 그들이 실제로 행한 것을 바로 행하려 할 때 이에 관심을 표시하고 있는 그 기록인 것이다.
殷代는 漢代에 復原되어 그 이후 많은 해설이나 또는 해설의 해설까지를 붙인 모양으로 전하여 내려온 중국의 정사로서 일찍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殷代가 중국역사상에 실재한 것인가 아닌가에 관하여 오랫동안 의문시되어 왔다.  殷代에 관한 고대의 여러 說은 역사라고 할 수 없는 애매한 추상적인 전설로 생각된 것에 불과하였다.
증명한 것이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수골과 갑골의 자료는 그들 殷人의 수령들의 이름을 확인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지배자들의 대대로 계속되어 내려온 순서가 그로부터 1000년 이상이나 뒤에 와서 漢代의 학자가 써서 남긴 계승(繼承)의 순서와 정확히 합치하고 있음을
漢代의 학자들이 써서 남긴 역사의 모양에 압축한 단편적이 자료 중에는 殷代보다 더욱 앞의 夏라고 불리는 일대에 관하여 전하여 오는 부분이 있다.  그 역시 夏代의 지배자의 이름을 표시하고 있음으로 보아 역시 중국의 정통한 역사는 夏代부터가 아닌가? 하는 신빙성에 무게가 주어지게 된다.
「夏나라」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며 하인(夏人)이 중국인의 정통일 뿐만 아니고 진정한 조상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殷代의 자료가 「정통적」 중국사를 확증한 주목할만한 방법에 의하여 대단히 확실시되게 된 것이다.  殷人의 문자도 또한 이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殷의 갑골문자는 그것 보다 1000년 이상이나 뒤의 청동기물의 문자에 비하면 「원시적」인 것이며, 그 자체로는 또한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중국문자의 形에 비교하면 역시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더욱이나 殷의 문자는 그 자체로 보아서도 결코 원시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벌써 수 백 년 간의 진화를 이룩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서 마침내는 이 중국의 대단히 오래된 역사에 관한 새로운 자료는 전체로서의 중국사의 위에 특별한 각도에서 하나의 빛을 투사하게끔 하게 되었다.  이 같은 자료는 역사학자와 같이 사회학자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그리고 바르게 취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자국의 최고의 역사에 관하여 독창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물론, 자국의 후대의 역사에 대하여 신선한 견해를 가지는 데까지 이른 위대한 역사의 해석이었던 것이다.
그 가장 좋은 예가 효도의 교의(敎義)와 그에 따른 아버지의 위신, 재산, 권위에 관한 관념인 것이다.  이 같은 敎令은 봉건시대의 왕후장상이 그의 소유물이나 전리품을 자손에게 내려 주려는 욕심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성장한 것으로서 왕조시대가 되고서 나라의 전체에 파급되는 제왕의 권위가 일가의 위에 파급되는 아버지의 권위에 비교됨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형식을 띠게 된 것이다.
받은 시대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여기에서 당연히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영원한 옛날로부터 확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무엇보다도 오래된 근거가 필요하게 되어 여러 가지로 탐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발견된 최고대(最古代)로부터의 증거의 연구에 사회학적 방법이 많이 채택됨에 따라서 前古典的 시대에 유산이 대대로 전하여 내려온 방법에 의한 고전의 해석을 이상히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타국들에도 있었던 것과 같이 중국에도 재산과 가족이 父系에 의한 것이 아니고 母系에 의하여 이어
그와 같은 증거는 보존되고 있었으나 후대에 와서 하나는 다만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남자가 주재하는 부족과 가족에게 권위를 주는 일에 있어서 구체적, 사회적 필요가 발생하는 까닭에 그의 고대로부터의 증거가 새롭게 왜곡되었을 것이다.
갑골문자는 우리들에게 기원전 1400년 정도의 중국사에 합당한 기록으로 주어지는 것이 된다.  殷의 지역에서 발굴된 골기(骨器), 도구, 무기, 거기에 다시 성벽이나 요새의 잔재 등 관한 연구에서 당시의 중국이 어떠한 사회였는지 비교적 명료한 상상이 그려진다.  그것은 결코 원시적인 사회는 아니었다.
북평(북경)에서 한구(漢口)에 가는 철도연변, 현재 개봉시가 있는 부근의 안양(安陽)에는 번화한 문명도시가 있었다.  그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 싸여 비교적 넓은 범위로 퍼져 있었으며 그 외에도 몇 개의 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사회의 수도다운 크기의 도시였다.
이 도시의 주민은 예부터 발달된 화장실과 항문을 마무리하는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농민이었으나 또한 아시아의 각지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일종의 수렵(狩獵)도 한 것이다.  그 수렵이란 길게 한 줄로 서서 농민들이 차차로 반원형으로 좁혀 가면서 한쪽으로 몰면 귀족들이 마차에서 활로 짐승을 사살하여 잡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농작물은 수수를 주로 하고 수수의 곡신(穀神)은 가장 중요한 신의 하나였다.  그밖에도 가족이나 부족의 조상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고 제사 지내기도 하였다.
있었으나 이것은 지방적으로 재배하거나 아니면 멀리 남방의 양자강지방에서 통상으로 입수하기도 하였다.  소도 알려져 있었으며 그 고기는 식용으로  조리하였으나 밀크나 버터 등의 유제품을 만들거나 사용한 증거는 없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그들은 또한 벼도 알고
이것은 중국인의 진화의 선이 가축이 없는 농업으로부터 동물을 갖게 된 농업으로의 진행을 보여 주는 유력한 증거다.  만약에 중국인이 처음에 유목민이었다가 나중에 정주하여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면 그들이 밀크의 이용법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일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중국인은 인도인의 조상이 처음에는 분명히 목축민이었다가 나중에 와서 농민이 되고 도시생활자가 된 것과는 상이한 것이다.
고대의 인도 문헌에는 그 점을 접촉할 수 있으나 중국문헌에는 그것이 없다.  인도인은 밀크나 버터를 쓰고 있으나 중국인은 쓰지 않고 있다.  또한 밀크와 버터는 인도에 있어서는 의식적, 종교의 의미를 갖고 있으나 중국에 있어서는 그 같은 면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기원전 1400년 그들 중국인의 농업기구는 또한 돌로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중국인은 석기의 농구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확실히 운하를 파고 물을 끌어 와서 농작물에 대어준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기술상의 농업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 하면 관개(灌漑)는 에이커 당의 수확과 평방 마일 당의 인구를 증가시킨 이외에도 이렇게 하여 얻은 잉여의 곡류로서 도시에 집중하여 스스로는 농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깊이 팔 필요가 없이 물을 사방으로 분배할 수 있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이 시대의 중국인이 벌써 관개에 성공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데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다.  먼저 평원의 평탄한 구릉은 물의 분배를 용이하게 하였으며 우물을 팔 수 있었다.  북중국에는 지금도 널리 행해지는 고간식(枯桿式, 기둥을 세우고 그 끝에 가로로 장대를 걸친 후에  막대저울의 원리로 한 쪽에는 큰돌을 매달고 한쪽 끝에는 항아리를 매달아 적은 힘으로 우물물을 퍼 올리는 기구)에 의한 관개는 토지를 대단히
기후는 비교적 불안정해 건조한 해가 계속되고 대단히 심한 건조한 해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았다.  이 같은 기후의 불안정성으로부터 사람들은 우량의 결핍에 대비하고 또한 수확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더욱 더 관개에 의존하였다.  이 특별도시의 규모나 왕후의 커다란 墓室의 깊이라든가 건축물의 토대 등으로 보아서 당시의 사람들이 관개에 필요한 토목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매년의 식량공급이 충분하게 보증되지 않았으면 그 같은 인구가 도시에 집중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농민이나 일부의 직업인들이 돌의 도구로 일을 하고 있는 반면, 귀족은 호화스러운 청동세공의 기술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청동 판을 덮은 마차나 마구를 썼으며, 청동의 투구와 요대, 검 등을 사용하였다.  기술이 대단한 직업인은 아름다운 容器를 주조하여 헌납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예술사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의 몇 개는 그의 초기의 시대에 속하고 있다.  주물의 기술은 결코 원시적인 것은 없었다.  주형(鑄型)을 랍형(蠟型)의 둘레에 바짝 녹인 청동을 유입하면 그의 랍형이 타버리는 방법 랍발형(蠟拔型)의 기술이었다.
이설도 잇는데, 청동을 사용한 귀족들은 중앙아시아의 어느 지방으로부터 침입하여 들어 와서 석기를 사용하고 있던 중국인농민을 정복한 이민족이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조직, 종교 기타 어떠한 것에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는 그 같은 사실을 증명할만한 아무 증거도 없다.  청동의 제조법은 다른 장소에서 발견되었다는 것과는 관계없이 중국 내에서 독자로 개발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며, 그렇지 않으면 정복민족의 현실의 이동을 수반하지 않고 석기시대의 느릿한 여행과 지식의 전파에 의하여 중국에 들어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같은 종류의 역사상의 문제의 중요성은 청동이 나타난 시대에 중국은 벌써 석기사용의 기초 위에 높은 문화와 기술을 가지고 있었나 없었나에 있다.  중국은 통상이나 발견을 통하여 청동이 나타났을 때는 벌써 고도의 석기사용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용이하게 청동기술로 이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용을 한층 더 성대하게 하는데 문제가 되는 것이 주로 원료의 공급과 수송이었다.  이 같은 문제는 그 어떠한 문화의 역사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어떻게 되었든 간에 하나의 고도의 기술은 벌써 상당한 고도의 발달을 이룩한 기술에는 비료가 되지만, 너무나 저급한 기술에는 고도의 기술이 어떤 보탬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험삼아 야만인에게 칼을 줄 수는 있으나 칼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그 이후에 사용의
예를 들어서 그들이 아주 미개한 원시인이라 하더라도 칼을 쓰는 관념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칼을 제작하는 관념을 가지는데 있어서는 그들이 어느 정도의 기술을 가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미국에 건너간 초기의 백인은 인디언에게 금속의 사용을 가르쳤으나 인디언의 기술은 너무나 지나치게 뒤떨어져 있어서 백인의 너무 급속한 진보 때문에 결국은 인디언의 그들 자신의 제철기술을 낳지 못하고 멸망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2500년경 즉 신석기시대가 한창일 때 벌써 청동을 사용하고 있었다.  殷의 청동문화는 이 석기시대의 뿌리로부터 직접 출생한 것이라 생각해도 결코 무리가 아닌 것이다.  금속은 서서히 석기에 대신하여 변하여 갔다.  그래서 수백 년 간은 석기와 금속이 병용되었다.
철이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500년경부터다.  중국인이 경이적인 계속성을 증명하는 사실의 하나는 오늘날 우리들이 중국의 어느 지방에서 농민이 곡류를 베는데 사용하고 있는 작은 낫(소겸,小鎌)을 보면 그 낫이 날 크기와 形狀도, 사용하는 방법까지도 대개는 그곳의 100야드 정도 앞의 장소에서 발굴된 돌의 刀物과 거의 같다는 사실 볼 수 있다.
그 뿐이 아니라 서북중국의 여러 지방에 있는 이들과 같은 농민들은 석기사용 민이 수 천 년 전에 파낸 것과 꼭 같은 구멍을 파며 살고 있다.  다만 틀린다면 고대인은 벌거벗은 단애(斷崖)의 정점에서부터 구멍을 파고 살았던 것이고, 근대의 혈거인(穴居人)은 그 단애의 횡복(橫腹)에 파고 살기를 좋아하는 점이라 하겠다.
중국역사상에 나타난 그 어떠한 침략이나 정복에 있어서도 근본의 뿌리를 수중에 매몰하고 마는 정도의 민족대이동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역사의 줄기는 벌써 먼 옛날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殷代는 자세한 년대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기원전 1700년경에 시작하여 1100년경에 끝났다.  그의 지배자나 인민도 다같이 중국인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신체적 특징이 현재의 중국인과 닮아 잇기 때문이다.  殷代이래의
민족 또는 그의 지배자도 타지방에서 살러 들어온 이주자 혹은 침입자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殷人은 그들 자신과 대단히 닮은 타민족과 종종 전화를 교환한 사실을 알고 있다.  중국인만큼 정치적으로 거대한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같은 것을 증명하는 것은 殷의 「首都」와 같은 城塞의 주위에 각각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다수의 「동족국가」인 것이다.  이들의 집단 중에서 아마도 殷은 가장 중요한 그리고 유력한 나라였음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殷은 결코 거기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며 이웃 여러 국가의 전부를 곧바로 평정하거나 통일할 수는 없었다.  일군의 나라들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만한 압도적인 세력은 수백 년 간에 중국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3. 周代, 봉건주의시대(封建主義時代)
중국을 900년에 걸쳐 지배하였으며, 또한 중국 역사상에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풍부하고도 복잡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殷에 이어서 周代는 기원전 1100년에서 221년까지 계속되었다.  殷을 정복한 周는 현재의 협서성(陜西省)의 서방에 살고 있던 문화가 낮은 민족이었다.  周는 처음에 독서마저 할 수 없는 민족이었으나 마침내
周는 외부에서 殷에 들어 와서 이를 정복한 외국인 혹은 오랑캐는 아니었다.  그들은 殷과 동일한 문화의 시원으로부터 나온 중국인이었다.  殷은 일찍이 황토질의 고원지대의 풍요한 동쪽에서 순조롭게 진보를 시작하였으나 여기에 반하여 周는 토지는 메마르고 물을 결핍된 지방에서 훨씬 뒤떨어진 성장을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殷은 그들은 오랑캐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단순한 지방의 종족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周人은 殷을 모방하고 정치적으로는 殷였보다 우세하였지만은 비교적 조야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고고학자가 周代를 청동기시대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기, 도구류 청동을 사용한 것은 먼저 殷에 의한 습득이었으나 周代에 와서 최고의 발달을 이룩한 것이다.
周代는 중국 문화사가들이 고전시대라고 부르며 그리스의 황금시대에 곧잘 비교한다.  그것은 ꡔ춘추(春秋)」나 「시경(詩經)」과 같은 위대한 중국고전을 낳았으며 이들의 고전들은 바로 20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중국사상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위대한 철학자들, 공자, 맹자, 노자, 묵자 등은 모두가 이 시대의 사람들이다.
중국에 봉건주의가 발생한 사정은 아주 명료하다.  황토질의 고원의 계곡 사이 또는 계곡이 계속되는 곳에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봉건적 규모의 작은 전쟁을 당하여 방위의 용이한 봉건사회를 이룩하는데 아주 좋은 토지가 얼마든지 있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周代의 사회는 명확한 봉건적 사회였다. 
周代 중국 황토질 토양은 관개가 용이하였으므로 반렵반농(半獵半農)의 원시적 혼합경제는 점점 집약적 농업으로 옮아갔다.  관개는 운하를 파는 것 이외에도 수리권(水利權)을 규정한다든지 공동체 소유의 관계설비를 방위하기 위하여도 공동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관개는 에이커 당의 수확과 평방 마일 당의 인구를 증가시켰다.
풍요한 저축 고는 약탈당하기 쉬우며 관개설비는 공격에 노출되기 쉬웠다.  여기에서 집약농업을 평화적으로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무인계급에 의한 방위가  필요하게 되었다.  무장(武將)에 이끌리는 군대의 병역부과와 관개설비의 건설유지사업을 위한 집단노동의 할당을 조정할 필요가 생기며, 이 같은 사정은 결국 군사적 지배와 민사적 지배를 독점하는 지방귀족의 발달을 돕는 결과가 된다. 
周代의 봉건주의는 결국 일종의 세포구조 형태의 사회를 가져왔다.  각 세포는 곡물을 안전하게 저장하며 주변 마을의 작은 농촌을 방위하기 위해 수비병을 배치한 성벽도시를 가지고 있었다.  성벽도시는 동시에 촌락으로 향하는 의료, 도구, 집기, 기타의 각종 상품을 생산하는 수직(手職)의 중심이기도 했다.  이들의 각 세포는 겨우 30마일에서 60마일 사방, 즉 도보나 차로 1,2일 이내의 곳을 활동의 범위로 한 것이다.  그것은 곡물이나 일용품의 수송이 그 이상의 원거리에서는 경제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대부터 계속 後代에까지 또는 바로 지금의 근대교통이 확산된 현재에도 중국의 농촌촌락에는 이 같은 세포구조의 그림자가 얼마간은 남아 있다.  원래는 주변의 농촌을 내란이나 약탈로부터 방위하기 위하여 건설되었던 성벽도시는 지금도 볼 수 있으나 이들 도시들은 성밖의 농민을 위하여 곡물을 저장한다든가 생활에 필요한 수공업제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계속하여 왔던 것이다.
대하여 직접적으로 행정을 행하는 통일국가의 지배자는 아니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봉건중국에서는 봉건구주와 같이 주권의 구체적 단위는 국민이 아니고 봉건영토의 영지(領地)였다.  그렇기 때문에 周代의 제왕들은 광범위하게 넓혀진 문화의 중심의 대표자였으나 그 나라를 구성하는 각 영토의 개개에
그들은 다만 봉건주의 범위 내에서 몇 사람의 대귀족들에게 진공(珍貢)을 요구하게 되었는데 불과하며 이들의 대귀족은 또 각각 같은 방법으로 보다 약소한 귀족에게 공순(恭順)을 요구한 것이다.  周의 지배자들도 또한 각자의 사유지를 소유하며 이 사유지에 대해서는 제왕으로서가 아니고 봉건귀족으로서 정치를 행한 것이다
周의 首都는 서방(西方), 현재의 협서성의 서안 부근에 약 300년 정도 계속 하였다.  그로부터 기원전 771년이 되어서 그들과 같은 종족이었던 「서이(西夷)」에 의하여 패배하고, 그 후에 周는 首都를 동쪽으로 옮겼으나 이로 인하여 반대로 殷의 영토였던 북방의 河南지방은 다시 중국문화의 중심이 된다.
황하하류의 이 대평원의 토지는 봉건주의를 포기하고 다음의 단계로 발전하는데 적합하였다.
소귀족들은 방위에 유리한 적은 곡간(谷澗)에 머무르면서 몸의 안전은 보호되었으나 각자의 봉건영토를 확실하고도 영구적인 경계에 의한 상호간의 구획이 될 수 없는 대평원의 생활에서는 대규모의 건설사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같은 사업을 행하는 데는 봉건영주들은 상호간에 공동적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게 되어 차례로 새로운 대규모의 동맹이 만들어지고 여기에서 나중에 와서 민족국가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이다.
후반은 기록도 잘 완비되고 연대도 명확하게 되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협서성의 황토질의 계곡은 이른바 「서강(西疆)의 見張役」이라고 말하는 세습귀족이 지배하는 변역(邊域)이 된 것이다.  이 계통으로부터 진(秦)의 봉건국가가 발전하여 왔으나 秦은 기원전 3세기에 와서 周의 계통을 타도하고 하나의 새로운 확실하게 집권한 帝國을 만들어 낸 것이다.  周代의
그 기록 중에는 周朝의 위신이 추락해 封建諸國이 차례로 독립을 시작했고, 쇠약해진 周朝를 통제하려고 서로 전쟁을 하더니 마침내 周帝國을 河南의 북방의 중요하지 않은 小領土로 몰아낸 사정이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러나 周帝國이 그 같이 통제된 것이 주권상의 변동이 발생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와 동시에 중국문화에 지배되고 중국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으로 가득 찬 지역은 점점 넓어졌다.  그것은 양자강 유역의 지방에 현저하게 많았다.  양자간 유역의 남부 諸國間의 전쟁은 수백 년 사이에 황하유역의 北部諸國의 同種의 전쟁과는 확실히 구별된다.  이들의 여러 전쟁결과는 양자강과 漢江이 합류하는 지점과 가까운 현재의 한구시(漢口市)가 있는 곳에 대초국(大超國)이 일어났다.
超의 지배자는 周朝 제2왕의 신하에서 나왔다고 전하고 있으나 그의 국민은 북방 중국인과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초나라는 양자강을 따라 내려오더니 해안까지 넓혀지면서 여러 왕국을 정복하여 갔다.  북방에 지배권을 확립한 나라가 아직 나타나기 이전에 남방을 지배하게 되었다.  결국은 周代의 종말을 고하는 최후의 격전은 이중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것은 미해결의 북방지배의 문제인 동시에 중국은 그의 중심을 황하유역에 둘 것인가 양자강유역에 둘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최후의 승리를 얻고 全中國을 단일 帝國으로 통합한 나라는 秦이었다.
중국철학의「師父」인 孔子, 孟子, 老子는 다같이 周代의 後半 끝없는 戰亂과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변동의 시대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나타났을 때 벌써 中國은 옛날부터의 高度文明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여 그들이 그저 端座와 명상만으로서 중국철학을 만들어낸 것처럼 오해하여서는 안 된다.  그들이 위대한 철학자로 된 것은 그들이 변동의 시대를 호흡하면서 살았다는데 있는 것이다.  目前에 일어나고 있는 변동은 사람들을 사고하게 하며, 생각하는 쪽으로 달리게 한 것이다.
벌써 풍부한 사상의 기념물, 傳說, 口碑, 문학, 종교, 사회제도 등을 가지고 있었던 하나의 과거를 다시 한번 일으켜 보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적 사건이나 문제의 의미를 탐구하면서 과거 가운데서 더욱이 의미 깊은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골라내어 이것을 현재에 맞추어 보았던 것이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위대한 사상가들은
예를 들면 노자가 그의 自然力에 관한 철학을 구축하였을 때 그는 당시에 벌써 옛 것으로 되어버린 중국의 자연에 관한 생각에 어느 정도 저버리는 바가 있었다.  그의 철학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철학적인 것이었으므로 그 후 수백 년 간에 神秘主義的 요소를 다분히 붙이고 보탠 것이다.  사실, 道家의 학문(노자의 철학은 이렇게 불린다)과 구별하였을 때의 통속의 道敎는 魔術과 奇蹟의 거대한 저장고다.  현재의 형태의 도교는 유교나 불교로부터의 借入이라드나 超自然的인 전설로 재수식(再修飾)된 것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공자의 철학은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는 개인과 가정, 국가를 위하여 일정한 윤리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개인과 가정, 국가와의 지위와 기능 모두가 변동하려 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었으며 또한 그가 古來의 說이나 口碑를 해석하여 바로 고치며 이것은 새로운 바람과 경향(傾向)을 불러 일으켰으며 마침내 이 경향은 경향으로 끝나지 않고 지배적인 규준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敎義는 중국 사회제도의 고전적 규범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敎義의 중심은 남자에 대한 여자의 順從이며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책임과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권위였다.  그리고 그 敎義로는 나라와 가정이 상이해서  군주는 국민이라는 가정에 대하여 가부장적 권위를 가지고 임하며 官僚群이 계급제도는 마치 부자형제의 하나의 거대한 가족구조와도 같이 등급이 매겨져 있었다.
공자가 수집(蒐集)한 당시의 이미 먼 옛날의 것으로 되어 있던 여러 자료 중에는 詩와 口碑가 있었다.  공자시대보다 훨씬 이전에는 사회도 가정도 혼인도 兩性關係도 재산소유권도 반드시 공자가 理想으로서 배울 만 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몇 개 구절이 그러하듯이 옛날의 문맥으로 보아서 그렇게 먼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곳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성서의 「야고보서」 중 「솔로몬」의 歌詞의 章題와 고대 히브리語의 「솔로몬」의 歌體의 내용을 비교하여 보면 공자의 경우와 비슷함을 보여 주고 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그 결과 오늘에 남아 있는 형태로서 전통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바와 같이 유교적 고전 중에는 구약성서 중의
 
4. 중국제국의 탄생
기원전 221년 중국최후의 獨立封建帝國은 대정복자 秦의 始黃帝에 붕괴하고 全中國은 처음으로 단일의 제국으로 통일되었다.  이 당시 로마와 카르타고는 서로가 그 유명한 三大戰爭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고 카르타고는 하니발이라는 영웅을 전설에 남기고 결국 괴멸하고 없었다.  중국의 제국형태의 정치는 기원전 221년에서 기원 1911년까지 계속하였다.  그래서 중국은 침략이나 내전에도 불구하고 2000년 이상에 걸쳐서 계속한 정치형태의 역사를 가지고 있게 되었다.
그 기록을 서양세계의 그것과 비교하여 보자.  앞에서와 같은 기간에 서양역사의 중심무대는 이태리에서 프랑스로, 스페인으로, 영국으로, 대서양과 북미주로 옮아갔다.  이에 대조하여 중국의 역사는 폐쇄적이고 정체적인 것 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중국이 그 자신의 내적 발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 극적인 흥미와 全人類의 년대기에 있어서 의미의 진가를 알기 위하여서는 그 발전의 주요한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과장된 면이 있다.  그가 이룩한 것은 중국각지의 諸王國들이 독립과 분열 중에서 서로 생존을 계속 할 수 있는 선택을 강요하는 방법으로 봉건세력을 파괴한 것이다.  독립을 위해서는 봉건왕국들은 시황제와 전쟁을 해야 했고, 분열을 선택한 경우에는 오로지 그에게 복속하는 것으로만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진의 시황제를 중국의 통일 자로 부르는 것은 약간
그러나 그가 발휘한 압도적인 군사적 공격력은 여기에 필적할만한 수송과 경제조직, 정치행정의 장악력을 수반하지 못하였다.  그의 군사적 근거지는 중국 서북 단에 있으며 이 변단(邊端)에서 그는 중국내부로 종횡의 진출을 시도하면서 중국봉건주의의 정치구조뿐이 아니라 또한 그 사회질서도 차례 차례로 격파하여 갔다.
그의 사후, 정복된 강토는 분해되어 격렬한 내전시대가 계속 되었다.  더욱이 중국인은 이 혼란으로부터의 탈출로를 봉건주의로 복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몇 사람의 지배자는 이것을 마음 속으로 생각은 하였지만, 봉건국가로의 회귀와 그 체제의 안정을 꽤하지 않고 끊임없이 분열과 통일을 반복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중국이 오늘  날에도 거대한 단일 국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바로 그 극도의 혼란기에 전 중국인이 하나의 민족이며 통일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자리하므로 서 가능해진 것이다.
진나라의 멸망 후에도 봉건체제로 복귀하지 않고 통일된 중국의 단일 제국에 대한 희망을 선택한 것으로부터 오늘날의 중국이 형성된 사실을 주지해야만 한다.  중국인은 진시황이 만들려고 마음먹은 것과 같은 종류의 제국을 다만 그보다도 정교하게 재통합하는 길만이 전진을 보장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제국의 건설이 실현되었을 경우에 그것은 진시황이 시작한 변단지방으로부터가 아니라 나라의 중심부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 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이와 동시에 그 후 몇 번이고
 
5. 漢 代
그런 중국인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룩된 신제국은 기원전 205년으로부터 기원 221년까지 계속된 漢王朝였다.
漢代는 그 중기로 기원전 9년에 한 역모자 왕장이 나타나서 왕위를 빼앗은 때문에 단기간에 중단되었다.  이 중단 시기를 경계로 하여 한대 전체를 前漢과 後漢으로 나눈다.  한대의 건설자는 황하와 양자강의 중간을 흐르는 회하(淮河) 유역의 평지로부터 왔다.  지리적으로 말하면 그는 북방의 봉건 諸王國의 잔해와 南方의 그것들과의 중간 입장을 점하므로 해서 그 세력을 굳힐 수가 있었다.
경력을 가진 인간의 덕분이었다.  옛 정치형태의 붕괴에 의하여 버려져서 토비로 유출된 가치 없는 인사들을 직접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그의 성공에 큰 도움이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속하여 있던 토비들을 정규군으로 조직하여 점차 그 조직을 확대함에 따라서 군사력을 기르는 한편, 지배 하에 들어온 경제적 요지에는 수하인이나 혈연자를 배속하는데 따라서 정치적 권력을 확립하여 갔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사회적, 정치적으로 말한다면 그가 권좌에 오르게 된 것은 그 자신이 봉건주의의 부활을 기획하는 순귀족이 아니고 오히려 말단관리나 法外土匪등의
점점 중국의 남은 부분의 전부를 손에 넣을 야망으로 그는 결전을 결심한다.  그렇게 하여 그는 전략적인 서북변단에 들어가 거기에 수도를 건설한다.  그리고 한번 이 변단에 근거를 잡은 다음에 그는 중국의 다른 부분의 전부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기 위하여 두 번 다시 이곳을 갈 필요가 없어졌을 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정복한 나라를 감시하고 공고화하기 위한 요지로서 이곳을 이용할 수가 있었다.
이 서북변단은 많은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장안(현재의 서안)의 수도는 위수(渭水)와 小河川이 황하에 합류하는 넓은 평야에 있었다.  이 평야의 수확은 제국수비병의 식량을 지급해 주었고 동방의 황하와 南方의 진령산맥(秦嶺山脈)은 중국의 여타 여러 지방에 집결한 반란군이 제국의 수도를 기습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의 황제들은 이 요지에 근거하여 중국의 전토를 내려다 볼 수 있고 또 몽고나 중앙아시아 변강(邊疆)을 감시하는 편의를 얻었다.  황하가 그 상류를 향하여 커다란 북향의 만(彎)을 이루는 곡선을 그린 이 지점은 漢에 있어서는 로마제국의 「다뉴브강」과 같이 중요한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 국경 외에는 로마인에게 성가신 헝가리의 諸種族이 있었듯이 중국인에도 귀찮은 종족이 있었다.  이들 종족을 정복하여도 크게 얻을 것이 없으며, 그들과의 통상은 유리하기도 하였으나 그렇다고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몽고의 건조한 평원은 농작에 적합하지 않았고, 따라서 당시 중국의 국고수입의 기초를 이루고 있던 농산물가격을 기준으로 하는 地租를 취하는데는 유리한 토지가 아니었으므로 이들의 토지를 정벌한다 해도 결국 전비에도 부족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별다른 관심이나 야심을 둘 필요가 없었다.
사이에 오랜 세월을 두고 불온한 관계가 이루어졌다.  중국인은 점차로 성장하여 오는 유목민종족의 병력을 격파하기 위하여 원정군을 일으킬 필요를 느꼈으나 될 수 있는 대로 그 같은 행동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그 같은 환경에서 중앙아시아와 몽고에 있었던 유목민과 정착 중국인
원정은 대단한 자금이 필요하였으나 하등 여기에 상응하는 수확은 없었다.  유목민은 유목민다운 이동성을 발휘하여 항상 천막을 비치하고 짐승무리를 쫓아 거의 끝이 없이 멀리까지 내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중국군대가 철수하기 시작하면 말을 탄 종족은 그 퇴각의 길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중국인은 로마인이 한 것과 같이 여러 가지의 대책을 강구하였다.  중국의 보충병력에 사역하기 위하여 작은 종족으로부터 병사를 고용하여 들여오기도 하고 타 종족과 싸우게 하기 위하여 다른 종족에 보조금을 주기도 하였다.
변강지역 밖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으로서 또 하나는 고역을 성대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근대의 저술가들의 많은 사람들이 이 통상의 성질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중국인은 이 잉여생산물을 팔기 위한 신시장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상업은 전체로서 잘 균형이 잡혀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말하여 중국의 대개의 지방에서는 제각기 필요한 합당할 만큼의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국의 중앙아시아와의 통상이 팽창한 배후에 작용한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던 것은 蠻族이 중국에 약탈의 목적으로 습격하여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수령들에게 그 필요물품을 파는 기회를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통상을 넓히기 위한 수단으로서 만족에게 중국으로 단체를 파견하는 것이 허가되어 그 단체는 「사절(使節)」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다.
물품, 예를 들면 금분, 양마, 기타 토지의 특산물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 공물의 답례로서 中國朝廷으로부터 견직물과 그릇과 기타의 중국산물을 「증물(贈物)」로서 받아 갔다.  그 외에도 이들의 사절단원들은 개인적으로 막대한 매매를 행하여 이익을 얻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또 그 공물 중에 특이한 것은 사절단들이 가지고 오는 사람들, 예를 들면 환관, 기예인, 기생이나 예쁜 숫처녀도 있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사절들은 보통 「공물(貢物)」이라 불리는 갖가지의
대게는 공물로 바쳐진 여자들은 황제나 황실의 하녀나 혹은 첩으로 바쳐졌는데, 그들은 정략적으로 중국 황실로부터 믿을만한 정보를 빼내 같은 종족에게 정치 군사적 이익을 안겨주는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사절단은 그런 대가로 받은 물품들을 갖고 돌아가서 다른 종족에 팔기도 하고 다른 물품과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로마까지 중국의 막대한 증물이 흘러 들어 간 것은 이 같은 연유로 이루어 진 것이다.
변강의 근처에는 또 중국인과 蠻族과의 혼혈민족이 생겼다.  그리고 이들의 혼혈민족은 만족과 싸우는 중국인의 전우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중국을 공격하여 오는 종족의 전우가 될 때도 있었다.  중국의 가장 유명한 장수 중에는 혼혈민족 출신자가 얼마든지 있다.  또 직업적인 중국병사로서 일하는 순수한 종족출신자도 있었다.  유명한 군인으로서 어느 때는 변방의 진영장군으로서 일하고 어느 때는 적군의 장군이 된 자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전쟁과 타협을 대대로 사용한 중국의 신중한 북변정책과 잘 균형을 이루어 중국인 자신은 점진적으로 양자강 유역을 넘어서 외부로 팽창하여 갔다.  중국인은 반렵반어민(半獵半漁民)이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는 밀림이나 작은 농지에서 경작을 하고 있던 약소종족과 접촉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작은 종족들은 완전하게 그리고 용이하게 중국으로 흡수되었다.  즉 「중국인으로 변한 것이다」
이 동화작용은 현재까지도 남부, 특히 동남연안지방에 중국어의 심한 각양각색의 사투리가 남아 있는데 대한 하나의 이유인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이들의 사투리는 어는 정도까지 역사의 파도에 밀린 파문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이 같은 것은 그들이 원래는 비중국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각양각색의 종족이 중국어 내지는 중국문명 전반을 채용한 여러 종류의 상이한 시기를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종이가 발명되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漢代에는 정치적 중앙집권과 지방행정의 재조직을 병행하면서 문화의 표준화와 그 진보가 행하여졌다.  한대의 직전에 중국인은 毛筆(붓)로 쓰는 것이 시작되었으나 이 개혁과 동시에 또는 이에 곧
이 새로운 실용품에 의하여 쓰는 문자의 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서 古典의 원문은 반복하여 쓰인 筆寫로 인하여 언제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여기서 발생한 변형 때문에 자연히 파손되어갔다.  따라서 같은 내용의 고전은 ‘누가 어떤 생각으로 섰느냐?’에 따라 그 내용과 의미가 전혀 달라졌다.
그래서 漢의 학자들은 돌에 조각한 권위 있는 원문을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그것은 나중에 돌에 조각한 원문에서 「탁본(拓本)」을 뜨는 방법이 시작되었고, 인쇄술의 발달에 중요한 향상을 이룩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한대의 학문과 출판활동은 중국의 記載言語에 하나의 영구적인 지표를 남긴 것이다.  이 시대에는 고전의 「결정판」의 출판 외에도 중국 최초의 사전과 최초의 백과전서와 같은 역사가 편찬되었다.  돌에 원문을 조각하는 것과 종이와 묵(墨)의 개량은 이로부터 수세기후에 중국인이 인쇄기술을 발견하기까지의 발달과정의 무수한 단계를 나타내고 있다.
한 대의 문화적 발전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의 하나는 불교의 도래인 것이다.  이것은 他國의 문화, 즉 인도문화 중에 발달한 여러 가지의 사상이 중국에 들어왔다.  최초의 불교의 출현은 가정과 국가에 하나의 제도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수세기에 걸쳐서 중국의 순례자들은 다만 성지를 방문하는데 그치지 않고 권위 있는 경전을 손에 넣기 위하여 인도를 향한 어려운 여행을 시도하였다.
있는 사상의 원천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중국의 학생이 구주나 미국에 나갈 수 있을 때까지에는 불교만이 면학을 위하여 고국을 떠날 가치 있는 것으로 중국인이 생각한 유일의 권위
 
6. 왕조의 흥망
漢朝는 불우하게 붕괴하였다.  이 붕괴는 얼마나 많은 왕조가 ‘왜 붕괴하고 새로운 왕조는 어떻게 하여 일어났는가?’하는 중국 역사의 근본문제의 하나 앞에 우리들은 끌고 간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이 문제를 「간한 제왕」과 「약한 제왕」의 차이에 따라서 설명하려는 방법이 주로 유행하고 있다.  이 같은 방법으로는 역사라는 것을 단순한 개인적 사건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서 이해하기에는 대단히 불충분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서 一村의 역사 이야기를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에서는 경제적 지배는 언제나 토지소유의 위에 놓여 있었다.  곡류의 수확고는 부의 척도였다.  현물의 곡류에 과세하는 능력이 국가권력의 척도로 되어 있었다.  저장 곡류는 수비병이나 상비군을 지배하는 능력의 척도였다.  사실상, 국가가 가지는 징세권과 지주가 가지는 지대수입의 권력 사이에는 항상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地代든 조세든 어느 것이나 가혹한 경제적 사실에서는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을 기르기 위하여 실제에 사용되지 않았던 잉여부분, 그것이 문제였다.
강력하였더라면 토지의 생산물의 과대부분을 지대의 형식으로 地主의 호주머니에 넣지 않고도 필요한 稅收를 확보할 수 있었다.  만약에 지주세력이 강력하여지면 그는 농민과 국가 간에 서서 토지가 생산한 부를 사적인 지대수입으로 흡수하게 됨으로써 국가권력에 대항하며 또한 이로부터 이탈할 수가 있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국가가
富라는 아주 중요한 문제에 관한 충돌은 지대를 받아 가는 지주와 조세를 징수하는 관사가 종종 동일인이었기 때문에 하나의 특수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중국은 항상 재정활동 때문에 막대한 量의 記帳事務를 필요로 하는 국가였다.  중국농업에 있어서의 관개의 중요성이 이 같은 일과 비상하게 관련이 있다.
캘리포니아나 기타 지방에서 관개가 중요한 지방에 사는 미국인은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관개농업에서는 水利權의 소유는 토지의 소유권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관개는 누가 얼마만큼의 물에 대하여 언제 또 어디서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가에 관하여 자세한 계산을 필요로 하고 있다.  정부의 주된 수입이 경작지의 생산력에 기초하여 계산되는 조세로부터 얻어지는 경우에는 국세대장과 지대장부는 똑같이 수리권의 기록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중국문화에 관하여 무엇보다도 현저한 한 가지 일은 그 기록의 기재언어가 분분하고 혼란한 것과 어려운 것이다.  중국의 문서는 (이집트의 그것과 같이) 물의 배당이나 지대, 조세 등의 할당을 지배하는 재력과 권력의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될 수 있는 대로 어렵게 기술하는 방법으로서 발달되어 내려온 것이란 사실은 생각해야 한다.
그와 같은 의견이 사변적인데 불과하다고 하지만 적어도 중국의 기재언어가 언제나 지나치게 어려워서 충분한 교육을 몸에 붙이고 익히기 위해서는 서양의 어느 나라의 문화의 경우보다도 많은 시간과 면학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은 현실 생활상에서 볼 때 누구라도 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주의 자식은 단순히 가산의 토지를 상속하는 前途의 덕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여기에서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노동으로부터 한가하기만 한 지주계급의 자식은 빈한한 소작인의 자식보다도 아무래도 면학의 기회가 더 많이 주어져 있었다.  이것뿐이 아니라 지주에 유리하게 되어있는 기록이나 계산을 행하는 능력이 또 조세를 징수하는 국가의 사용인이 되는 필수의 자격이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고위의 관직에 오르기 위한 기회를 보통의 사람들보다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실제상에 있어서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보는 것은 용이하다.  정부의 고관은 대부분이 토지소유가족의 출신이었다.  그들은 부유한 지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기보다는 조세의 무거운 짐을 농민들에게 전가하는 방법으로 그 재산의 유지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농민이란 또 지대를 지불하는 것으로 지주의 재산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었으나 그 과정은 궁핍한 농민을 한층 더 궁핍하게 하여 마침내는 살기 어려울 정도에까지 내몰았다.  이 같은 것으로 보아 중국의 기나긴 역사 가운데서 우리들은 정기적으로 출현하는 동일현상의 설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즉 하나의 번영하는 국가와 문명적인 宮廷과 낭비적이고 국내의 여러 곳에 할거하는 거대한 재산과 교양을 가진 여러 귀족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반대로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농민과 피치자들이 동시공간에 존재하는 시대가 있는 현상입니다.
얼마 안 가서 야만적인 농민들에 의하여 일어난 무서운 폭동과 동란, 그 결과로서 혹심한 혼란을 가져왔다.  이 같은 폭동의 와중에선 검을 휘두르고 권력을 잡고 중국의 고전(특히 공자의 그것들)에서 설명하고 있는 예양(禮讓)있는 철학적인 규준 등에는 전연 믿음을 가지지 않은 다수의 武人이나 野心家들이 들고일어났다.
이 같은 사람들이 한번 권력을 잡게 되면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곧 확실한 세입의 필요에 쫓기곤 하였다.  그래서 정부행정의 기록에 능통한 학자를 자기의 지배 하에 두어야만 새로운 왕조를 안정적으로 건설하는데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성공의 관건이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그러나
절박한 왕조의 안정을 맡을 인물은 역시 타도의 대상이었던 과거의 관리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가 신왕조의 요구를 해냈을 때, 또 과거의 악순환은 계속된다.  학자행정관은 필연적으로 학자지주이기도 하였다.  그는 신왕조에 벼슬하여 공무에 종사하면서 자신과 후계자를 위하여 토지재산을 만들었다. 
기원 221년에 漢朝가 멸망하기 전후의 혼란기에는 그 이외에도 주목할만한 요인이 일어나고 있었다.  중국의 諸皇帝는 자기의 종복인 동시에 경쟁자이기도 한 지주계급의 상위에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각양각색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수단을 겸하는 조직을 만들어 내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 수단의 하나로서 환관제도(宦官制度)가 있다.
환관은 한 代마다 더욱 더 세력을 증가하여 가는 경향이 있었으나 가정을 가질 수 없는 환관은 무엇보다도 먼저 황제의 종복이며, 그리고 궁정만이 아니고 정부 내에서도 왕에 봉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수단을 가지고도 확실한 그리고 영구히 권력을 독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환관은 중국의 역사 한가운데서 하나의 음흉한 역할을 연출한 것이다.  그들이 악정의 유일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없으나, 악정이 다른 이유에서 벌써 시작하였을 때는 그들은 언제나 그 최악의 상황의 전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방의 부호가 그 실력을 충실하면서 토지수입을 가능한 한 그 원천에서 막아서 정부
다른영화
관련링크